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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스미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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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인물로, 후지와라 북가 출신이다. 지방 관리로 시작하여 해적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이후 세토 내해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력을 확장했으며, 기나이 지역까지 진출하여 조정에 위협이 되었다. 941년 조정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이요에서 붙잡혀 옥사하거나 살해되었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보다 장기간 지속되었으며, 그의 전투 모습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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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스미토모
기본 정보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우타가와 요시나오]] 그림, [[츠쿠도 신사]] 소장)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우타가와 요시나오 그림, 츠쿠도 신사 소장)
시대헤이안 시대
사망941년 7월 17일 (?)
출생지현재의 우와지마시 (?)
관위종5위 하, 이요노죠
씨족후지와라 북가나가요시류
부모아버지: 후지와라 요시노리
형제스미하루, 스미요시, 스미토모, 스미노리, 스미타다, 스미모토, 스미유키, 스미나리
자녀아리노부, 기넨, 이오마루, 마즈미
별명남해의 용
가계
씨족후지와라 씨
가문후지와라 북가
인물 정보
생몰년도몰년: 덴케이 4년 (941년)
활동 영역헤이안 시대
직업귀족, 무사
주요 활동
주요 사건덴케이의 난

2. 경력

후지와라 일문 가운데 가장 돋보인 후지와라 홋케(北家) 출신으로, 대숙부로는 셋쇼(攝政)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가 있지만 일찍 아버지를 잃어 교토에서의 출세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방관으로서 당초에는 당숙인 이요노카미 후지와라노 모토나(藤原元名)를 따라 종7위하 이요노죠로서 당시 세토우치에 발호하던 해적들을 진압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모토나가 귀임한 뒤에도 교토로 가지 않고 이요에 그대로 머무르게 된다. 조헤이(承平) 6년(936년)경에는 해적의 두령이 되어, 이요(에히메현)의 히부리 섬을 근거지로 삼아 1천 척 이상의 배를 거느리고 주변 해역을 휩쓸며, 이윽고 세토나이카이 전역에 세력을 떨치게 된다.

간토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난을 일으켰을 무렵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세토우치의 해적을 이끌고 난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세력은 기나이에까지 진출했고 덴교 2년(939년) 12월에는 부하 후지와라노 후미모토(藤原文元)로 하여금 비젠노스케(備前介) 후지와라노 다네타카(藤原子高)·하리마노스케(播磨介) 시마다 고레모토(島田惟幹)를 셋쓰(攝津)의 스기역(須岐驛)에서 습격하게 하여 사로잡았다.[2]

교토 조정은 스미토모 추토를 위해 산요도추포사(山陽道追捕使)의 장관으로 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 차관에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 등을 임명하였다. 조정은 스미토모를 회유하려 그에게 종5위하를 내렸는데, 스미토모는 일단 조정의 위계를 받기는 했지만, 해적 행위는 그만두지 않았고 이듬해 덴교 3년(940년) 2월에는 아와지(淡路)의 병기고를 습격해 그곳에 있던 무기를 빼앗았다.[2]

그 무렵 수도에서는 각지에서 방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조정에서는 스미토모가 수도를 습격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여 궁정의 14문마다 군사를 배치하고 야마시로(山城)의 입구인 야마자키에 경비를 강화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야마자키가 전소된다.[2]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 조헤이·덴교의 난 === 항목을 참조.

2. 1. 초기 경력 및 해적과의 관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후지와라 북가(北家) 출신으로, 대숙부로는 셋쇼(攝政)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교토에서 출세하기는 어려웠다.[2]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당숙인 이요노카미(伊予守) 후지와라노 모토나(藤原元名)를 따라 종7위하 이요노죠(伊予掾)로서 세토우치에서 활동하던 해적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헤이(承平) 6년(936년)경에는 해적의 두령이 되어 이요(伊予)의 히부리 섬(日振島)을 근거지로 삼아 1천 척 이상의 배를 이끌고 주변 해역을 휩쓸었다는 기록이 있다.[2]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미토모는 초기에는 해적 진압 쪽에 있었으나, 이후 해적 세력과 연계하여 반란을 주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타가와 쿠니요시 그림

2. 2. 조헤이·덴교의 난

조헤이(931년 ~ 938년) 6년(936년)경,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는 이요국(현재의 에히메현) 히부리섬을 근거지로 삼아 1천 척 이상의 배를 이끌고 세토 내해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2] 덴교 2년(939년) 12월, 간토 지방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난을 일으킨 것과 거의 동시에, 스미토모는 세토 내해의 해적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세력은 기나이 지역까지 진출했으며, 부하 후지와라노 후미모토(藤原文元)를 시켜 비젠노스케(備前介) 후지와라노 다네타카(藤原子高)와 하리마노스케(播磨介) 시마다 고레모토(島田惟幹)를 셋쓰국 스기역(須岐驛)에서 습격하여 사로잡았다.[2]

덴교 3년(940년) 2월, 스미토모는 아와지국의 병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같은 해, 수도에서는 방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조정은 스미토모의 수도 습격 가능성을 우려하여 야마시로국 야마자키의 경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얼마 후 원인 모를 화재로 야마자키가 전소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스미토모 세력이 헤이안쿄 주변까지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진압된 후, 조정은 스미토모 토벌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덴교 3년(940년) 8월, 스미토모는 4백여 척의 배를 이끌고 이요국사누키국의 관청을 습격하고, 비젠국빈고국의 병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나가토국을 습격하여 관물을 약탈했다. 10월에는 규슈다자이후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11월에는 스오국의 주전사(鑄錢司)를, 12월에는 도사국 하타군(幡多郡)을 습격했다.

덴교 4년(941년) 2월, 스미토모군의 간부 후지와라노 쓰네토시(藤原恒利)가 조정군에 항복했다. 조정군은 그의 정보를 바탕으로 히부리 섬을 공격하여 스미토모의 본거지를 함락시켰다. 스미토모는 서쪽으로 도망쳐 다자이후를 점령했지만, 그의 아우 후지와라노 스미노리(藤原純)는 야나가와(柳川)에서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守)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賴)에게 패배했다. 5월, 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가 이끄는 조정군이 규슈에 도착하여 스미토모를 추격했다. 스미토모는 하카타만에서 조정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8백여 척의 배를 빼앗겼다. 그는 아들 시게타마루(重太丸)와 함께 이요국으로 피신했으나, 6월에 이요 경고사(警固使)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에게 붙잡혀 옥사했다(《일본기략》에는 도야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2]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두 달 만에 평정된 것에 비해,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거의 2년에 걸쳐 일어났다.

3. 계보

아버지는 후지와라 씨 북가 출신 후지와라노 요시노리(藤原良範)이며,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들로는 후지와라노 아리노부(藤原有信), 후지와라노 기넨(藤原紀年), 후지와라노 이오마루(藤原伊王丸), 후지와라노 나오즈미(藤原眞純, 또는 直純[10])가 있었다.[9]

훗날 아리마 씨와 오무라 씨 등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후손을 자처했다.[11] 지쿠고국의 가마치 씨 또한 스미토모의 후예라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7]

3. 1. 출신에 대한 이설

스미토모가 후지와라 씨의 혈통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유력한 이설이 있는데, 스미토모는 원래 오치씨(越智氏) 일족으로서 이마바리의 다카하시노 도모히사(高橋友久)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후지와라노 요시노리가 이요의 고쿠시로 부임했을 때 스미토모를 양자로 삼아 후지와라 성을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8]

4. 근년의 연구

최근 연구에서는 스미토모가 진압(무력 행사 내지 회유)한 해적과, 난을 일으킨 스미토모가 휘하에 거느렸던 해적의 성격 차이가 지적되고 있다.[2]

후지와라노 모토나(藤原元名)는 후지와라노 요시노리(藤原良範)의 사촌 형제로, 조헤이(承平) 2년부터 5년에 걸쳐 이요노카미(伊予守), 즉 이요의 수령(태수)이었다. 스미토모는 이요 태수 모토나의 대행으로서 이요 현지에 파견되어 교토까지 조세를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당시 부호 출신 사인이 대부분이던 해적 세력들과 관계를 형성했다고 여겨진다.[2]

4. 1. 해적의 성격 차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미토모가 진압했던 해적과 난을 일으킬 때 거느렸던 해적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2]

구분진압 대상 해적스미토모 휘하 해적
출신일본 조정의 기구 개혁으로 일자리를 잃은 세토나이카이 부호층 출신 사인(舎人)무예에 뛰어난 중급 관리층 (부모 세대의 요절 등으로 신분 상승 기회 상실, 귀족 사회에서 탈락)
목적기존 조세 징수 기득권 주장, 교토 운반 조세 탈취무공을 통한 훈공 인정, 입지 회복 및 신분 상승 도모 (도고쿠 등지의 1세대 무사와 유사)
비고수령(受領)층의 하급 귀족에게 훈공을 빼앗기거나 착취당하며 불만 증폭, 스미토모 봉기에 가담


5. 다이라노 마사카도와의 공모설

당시 조정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동·서에서 함께 모반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다. 히에이 산에 올라 헤이안쿄를 내려다보며, 훗날 난을 일으켜 수도를 차지하고 마사카도는 간무 천황의 자손이니 천황이 되고, 스미토모는 후지와라씨이니 간파쿠가 되자고 맹세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1] 히에이 산에는 이 전설과 관련된 '마사카도 바위'가 남아있다.[2] 당시 구교들의 일기에도 이 두 난에 대해 '계략을 서로 맞추어'라고 적혀 있어, 당대에도 두 사람이 함께 모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3]

하지만 실제로 양자가 공동 모의한 흔적은 없고, 오히려 자신의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하다 무장봉기로 몰려 '역적'이 된 색채가 더 강하며, 그 시점이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4] 한편, 마사카도에게 습격당해 고쿠시의 인일(印鎰)을 빼앗기고 교토로 도망쳤던 고즈케노스케(上野介) 후지와라노 히사노리(藤原尙範)는 스미토모의 친숙부인데,[5] 마사카도의 난이 히사노리의 친족인 스미토모에게 심리적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6]

6.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모시는 신사


  • 나카노 신사(中野神社)[3] (현 에히메현 니이하마시): 이 지방에서 사로잡혀 살해된 스미토모의 원령을 모시고 수호신으로 삼은 전국 유일의 신사이다.
  • 스미토모 신사 (현 오카야마현 마쓰시마): 마쓰시마 동쪽에 있는 가마시마가 스미토모 군의 근거지 중 하나였고, 마쓰시마에는 출성이 있었기 때문에 섬 주민들이 수호신으로 사당을 세웠고, 현재는 진수사(鎮守社)가 되었다.

7. 평가 및 영향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당시 일본 사회의 불안정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이 난은 지방 세력의 성장과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드러냈으며, 이후 무사 계급이 발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스미토모의 난은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불과 두 달 만에 평정된 것에 비해 거의 2년에 걸쳐 일어났다. 또한, 스미토모의 전투 모습은 《스미토모추토기》로서 추포사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었고, 그 내용의 일부가 《부소략기》에 인용되어 있다.

오카야마현 마쓰시마(松島)의 스미토모 신사(純友神社)와 에히메현 니이하마시의 나카노 신사(中野神社)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이다.[3] 특히 나카노 신사는 이 지방에서 사로잡혀 살해된 스미토모의 원령을 모시고 수호신으로 바꾼 전국 유일의 곳이다.

나카노 신사 터의 석비


8. 대중문화

1976년 NHK 대하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무지개와에서는 오가타 켄이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가토 고가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연기했는데, 교토에서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 소설
  • * 요시카와 에이지, 『평의 장문』(고단샤)
  • * 카이온지 쵸고로, 『바다와 바람과 무지개와』 (절판)
  • * 호쿠토 켄조, 『절해에 있지 않다』(주오코론신샤)
  • * 유메마쿠라 바쿠, 『음양사 타키야샤히메』(분게이슌주)
  • * 코이케 카즈오, 『꿈 겐지 검무』(카도카와 쇼텐)

참조

[1] 문서 朝廷は純友を従五位下に叙したとされる
[2] 문서 ただし、この過程については、土着する過程で自らが海賊化したとする説と、伊予に土着後に後任の伊予守である紀淑人に協力して海賊の帰順にあたっているうちにその信望を集めたものの紀淑人への不満から彼らに推されて指導者となったとする説がある
[3] 웹사이트 941年の死後まもなくして中野山に中野神社として祀られていたが明治2年に新高神社の境内社として移されていた。だが平成16年の台風により全壊し御霊代は新高神社本殿に合祀された https://drive.google[...]
[4] 서적 有馬系図
[5] 서적 大村系図
[6] 문서 『姓氏家系大辞典』では肥前国の豪族である大村直の後裔とする
[7]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8] 학술지 藤原純友伝承に関する一考察 https://doi.org/10.2[...] 愛媛県歴史文化博物館 2001-03
[9] 서적 아리마계도(有馬系圖)
[10] 서적 오무라계도(大村系圖)
[11] 문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손자라는 후지와라노 나오즈미의 후손을 자칭. 또한 「성씨가계대사전(姓氏家系大辭典)」에서는 히젠의 호족인 오무라노 아타이(大村直)의 후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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